top of page

술래잡기

 SIO

 

 

 

가 왔다. 사내는 그 어떠한 것을 막으려 창문을 이중으로 걸어 잠그고, 두꺼운 커튼을 치고, 두터운 이불 속에 숨어 온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벌벌 떨리는 사지를 둥글게 말아 숨기고, 숨기고, 어떠한 ‘목소리’와 어떠한 ‘환영’을 피해 귀를 막고 눈을 막고, 그 아래에 숨어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를 뚫고, 이중 창문을 뚫고, 커튼을 쳐내고, 두터운 이불을 걷어내고, 귀를 틀어막은 사내의 손을 살포시 감싸 들어 올리고 속삭였다.

 

-팬텀….

“아리아, 제발 이러지 마. 아리아, 아리아.”

 

하얀 손이 그를 껴안아 앉게 했다. 팬텀은 ‘하지 말라’고 끝없이 중얼거렸으나, 결국 그 손길이 이끄는 대로 일어나, 앉아, 그 ‘어떠한 것’을 바라보았다. 하얗고, 고운, 매끄러운 푸른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는 여성의, 그 어떠한, 모습.

 

-팬텀….

“아리아, 아리아….”

 

그것은 아름다웠다. 아름다웠고, 찬란했고, 상냥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고, 다정하게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았다. 모두 자신의 환영일 뿐이라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것을 외면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기에는 너무 사랑스럽고, 따뜻했고, 또한 그의 기억 ‘그대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그를 한 번 부르면 그는 그것을 두 번 불렀다. 그것이 그를 껴안으면 그는 그것을 마주 안았고, 그것이 그의 볼에 키스를 하면 그는 그것의 입술에 키스를 넘겨주었다. 그는 제 모든 것을 넘겨 줄 것처럼 그것을 끌어안고 쓰다듬고 사랑했다. 그것은 그럴수록 그를 옥죄었다. 소름끼칠 정도로 따스한 그것은 현실보다도 현실같이 선명한 하얀 손으로 그의 목을 졸라왔다.

 

-왜, 나를, 지켜주지, 못했어요?

“아리아.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나는 당신을 기다렸어요, 팬텀.

“아리아, 미안해, 미안, 하지만, 하지만…, 나는, 나는….”

-당신은 오지 않았고, 나는 죽었어요. 그것이 사실이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팬텀? 그렇다면, 당신이 나를 죽인 것이지요? 그렇지요?

 

팬텀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그러나 이내 눈을 들어 그것을 마주하고, 그것이 뚝뚝 흘리는 붉은 액체가 피부에 닿음을 느끼고, 그것이 소름끼치도록 차갑게 식은 손을 올려 그의 볼을 잡았을 때,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내가, 내가 널 죽인거지. 아리아, 맞아.”

 

그는 손을 뻗어 붉은 것이 방울방울 맺혀 흐르는 하얀 볼을 쓰다듬었다. 그것의 볼이 붉은 것으로 가득 물들고, 그의 장갑이 붉은 것으로 촉촉해졌다. 그것은 해맑게 미소 지었다. 차디 찬 팔이 그를 가득 껴안았다.

 

-팬텀….

 

그는 거부하지 않고 그것을 마주 껴안았다. 그것은 차가웠으나 따스했고, 품에 쏙 들어 올 정도로 작고 가냘팠으나,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워 터져 나갈 듯 했다.

 

-나의, 팬텀, 나의, 나의 괴도, 나의 사랑, 나의 아름다운, 나의, 나의.

 

그것이 해맑게 웃으며 그의 눈두덩을 쓸었다. 그는 그것이 이끄는 대로 그 보랏빛의 눈동자를 감았다. 그것은 붉은 것이 가득 번진 고개를 숙여 그의 귓가에 속살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희열과, 동정과, 사랑과, 그 ‘어떠한 것’이 가득 담겨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울며, 혹은 웃으며 그것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말을 마치고 다정한 손길로 그를 쓸었다. 그는 눈을 떴다. 그것은 사라졌다. 그것이 흘린 피는 어느새 다 말라버렸는지 흔적조차 남지 않았고, 그것이 있던 비단 이불은 주름하나 잡혀있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그 자리에 없었다.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위해 울었다. 그것을 위해 우는 자신을 위해 울었다. 존재하지 않는 사랑의 허상에 홀려 허우적거리고, 휩쓸리고, 눈물을 흘리고, 사랑을 나눈 가여운 자신을 위해 울었다. 아리아 여제는 죽었다. 비가 오던 날에, 아리아 여제는 죽었다.

 

여명이 밝았다.

 

 

*

 

 

또 비가 왔다. 그는 이번에는 어떠한 것도 하지 않았다. 비가 들도록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커튼은 걷고, 두터운 이불은 개어놓고, 얇은 시트 위에 가만히 앉아 그것을 기다렸다. 그는 눈을 감고, 가만가만 그것을 기다렸다. 고요한 적막이 방 안에 침잠하고, 그를 침잠시키고, 새벽이 되어 모든 것이 잠겨갈 즈음에, 그는 눈을 떴다. 그것은 빙그레 웃으며 어느샌가 그의 곁에 앉아있었다.

 

-팬텀. 기다렸어요?

“응, 아리아. 기다렸어.”

-나를요?

“응, 너를.”

 

그것이 고개를 젖히며 까르르 웃었다. 아이마냥 손뼉을 치고,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하얀 원피스가 나부꼈다.

 

“오늘은 왜 드레스를 입지 않았어?”

-불편하잖아요, 당신을 만날 때만이라도 편하게 있고 싶은 걸요. 왜요, 이 옷은 별로에요?

 

그것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는 그럴 리가, 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것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네? 뭘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것이 고개를 기울였다. 여황의 핏줄을 나타내는 찬란한 금발이 사르륵 하고 현실감 있게 흘러내렸다. 그는 그것을 애써 못 본 척하고 웃었다.

 

“지난번에 약속했잖아, 술래잡기를 하고 놀아주겠다고.”

-아아. 그랬었죠, 참?

 

그는 방긋 웃는 그것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었잖아. 이제 기억나? 그것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억나요. 그리고 그 조건은-

 

“쉿. 그건, 나중에 끝나고.”

-아, 응. 끝나고. 응.

 

그는 그것의 말을 막았다. 그 조건은 모든 것이 끝난 후에 공개될 것이었다. 그것은 아이마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것을 보며 푸스스 웃었다. 바스라질 것만 같은 아슬함을 겨우 견뎌내며 그는 그것을 복도로 이끌었다. 어둠이 가득 매운 복도에 하나의 사람과 하나의 그것은 각각 등불을 하나씩 들고 술래와 그 반대가 되었다. 그것은 술래, 그는 그 반대.

 

-자, 팬텀. 도망치는 거예요?

“그래, 아리아.”

 

그것이 눈을 가리고 돌아섰다. 하나, 둘, 숫자를 세는 그것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지막 숫자는 오백. 오백이 될 때까지 그는 숨을 곳을 찾고, 그 이후는 그것의 찾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아침이 올 때까지, 아침이 올 때 까지 그것이 그를 찾아내지 못하면―

 

그는 달렸다. 복도를, 계단을, 수많은 방을 지나쳤다. 그는 계속해서 달렸다. 또 한 번 무수한 복도를, 계단을, 방을 지나쳤다. 그는 또 달렸다. 또 한 번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뛰어, 수많은 방을 지나쳤다. 그는 마침내 하나의 방에 다다랐다. 그는 그 방에 숨어들었다. 그 방에 숨어들어 문을 걸어 잠그고, 창문을 걸어 닫고, 두텁고 두터운 커튼을 치고, 두꺼운 이불을 펼쳐 그 아래로 숨어들었다. 그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숨을 죽였다. 그것의 오백은 금방 끝날 것이다. 긴 복도도, 수많은 계단도, 무수히 이어진 방들도 그것에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는 그래서 숨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그가 달리고, 숨어서, 숨을 죽이는 동안, 그것은 아주 느리게 수를 셌다. 하나아, 두울, 세엣, 네엣, 다서엇…. 숫자는 무수히, 끊임없이, 아주 많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 사실이 짜증나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게임의 ‘규칙’은― 산 자와 죽은 자가 치르는 게임의 규칙은 엄중히 지켜져야 했기에, 그것은 지루함과, 지겨움과, 짜증을 견디고 끝까지 수를 셌다. 숫자는 마침내 삼백을 넘고, 사백을 넘고, 오백에 이르렀다. 그것은 발걸음을 옮겼다.

 

-패앤터엄, 어디에 있나요? 여기 있나요?

 

그것은 방문을 열어젖혔다. 열린 창문 새로 들어온 빗소리가 방 안을 가득 매웠다. 들친 비가 창틀을 축축이 적시고 있었다. 그것은 혀를 차며 방으로 걸어 들어가 창문을 닫았다. 빗소리가 끊겼다. 방 안에는 이제 고요가 맴돌고 있었다. 창틀은 여전히 축축했으나 그것은 소리가 끊긴 것으로 만족하며 방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그것은 긴 복도가 지루했다. 그것의 연약한 다리에 긴 복도는 무리였다. 수많은 계단도 무리였다. 모든 방문을 열어보는 것은 더더욱 무리였다. 그러나 그것은 해야 했다.

 

-규칙은,

“지켜져야 해.”

 

아침은 아직 오지 않았다.

 

 

*

 

 

그것은 긴 복도를 걷고 있었다. 등 안에 든 초는 거의 녹아 없어져 있었다. 그것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복도 촛대에 놓인 새 초를 뽑아 들었다. 그것은 불길을 새 초에 옮겨 등불 안으로 밀어 넣었다. 등불은 다시 환하게 밝았다.

그것은 다시 복도를 걸었다. 그의 발길이 남긴 흔적을 따라 계속 걸었다. 그것은 사실 그녀와는 달리 약하지 않았다. 그 복도쯤은 얼마든지 걸어낼 수 있었다. 그 수많은 계단도 그것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의 약점은 그것이 그녀라는 점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그녀라서, 그것을 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행군이 계속되자 그것은 전혀 힘들지 않음을 느꼈다. 그것은 이상하다 느꼈으나 계속 걸었다.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걷고, 방문을 열어젖히고, 그것은 그것을 무수히 반복했다. 그것은 그녀가 아니었으므로, 전혀, 하나도 지치지 않았다. 그것은 그것을 깨닫고 방긋 웃었다.

 

-승리는 내거야. 팬텀, 내 사랑하는 사람. 기다려요, 지금 갈게.

 

그것은 뛰었다. 뛰면서 방문을 열어젖히고, 계단을 오르고, 또 뛰고, 또 열고, 또 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지치지 않았다. 그가 숨어든 방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침은 아직 오지 않았다.

 

 

*

 

 

그것은 이제 다섯 개의 문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것은 여유를 가지기로 했다. 천천히 나아가자, 게임이 일찍 끝나는 건 재미없으니까. 그것은 몇 번째인지 모를 방문을 열었다. 고요한 적막이 맴도는 방이었다. 빗소리도 없는, 조용한 방이었다. 그것은 그 문을 닫았다.

 

-여긴 아냐.

 

그것은 다음 문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그 문의 고리를 돌렸다. 잠겨있었다. 그것은 그 문을 열지 않았다.

 

-이건 아냐.

 

그것은 또 다음 문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그 문을 지나쳤다.

 

-…….

 

그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음 문으로 나아갔다. 그 문은 잠겨있지도, 닫혀있지도 않았다. 활짝 열려 있었다. 그것은 그 방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두터운 커튼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어 비가 창틀을 적시게 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펼쳐진, 온기가 남아있는 두꺼운 이불을 손으로 쓸었다. 그것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여기도 아니구나.

 

그것은 마지막 문으로 나아갔다. 그 문은 잠겨있었다. 그것은 그 문을 통과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어떠한 것도 그것의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문을 통과 하는 순간에, 그것은 멈추었다.

 

-……팬텀?

 

그것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 방은 아주 익숙했으나, 또한 매우 낯설었다.

 

-팬…텀. 어딨어요, 어디, 어디에, 팬텀, 어디에 있어요!

 

그 방은 그럴 수 없는 방이었다. 그 방은 그녀의 방이었다. 그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그녀의 방이었다. 그것은 걷힌 커튼을 보았다. 열린 창을 보았다. 아무렇게나 뒤집어진 두꺼운 이불을 보았다. 그것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그것은, 그것은 보았다.

붉은 것이 가득한 사이에 놓인 그를 보았다. 그는 창백했다. 그것은 그를 껴안았다. 그는 차게 식어있었다. 그것은 그를 불렀다. 팬텀, 팬텀.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것이 부르면 마주 불러주던 상냥하고 다정한 그의 목소리는 없었다. 그것은 그를 다시 불렀다. 팬텀, 팬텀. 팬텀! 그는 답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다정하지 않았고, 상냥하지 않았고, 따스하지 않았고, 또한 그것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그는 죽었다.

 

마침내 아침이 왔다. 새가 지저귀고, 금색의 햇살이 저택을 비췄다. 그것은 땅 곳곳에 남은 비 웅덩이에 스며들었다. 그것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괴도, 괴도 팬텀, 여제 아리아를 사랑했던 괴도, 그는 죽었다.

 

 

**

 

 

-게임을 해요. 당신이 내게 속박되거나, 내가 당신에게서 사라지거나.

 

“내가 어떻게 네가 사라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 너는 내 전부인걸.”

 

 

***END***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