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는 환영幻影
LUCID DREAM
이곳은 에레브의 정원. 신수가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아리아 여제가 죽은 곳이기도 했다. 시그너스가 에레브의 주인으로서 여제가 된 이후에 팬텀은 단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리아가 죽던 그 날부터 들어오지 않았다. 들어오면 분명 편안히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들어올 수 없었다. 트라이아에서 시그너스 여제의 알현식(에레브의 성에 미확인자를 데려오는 것은 위험이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트라이아에서 알현식이 열린다)이 있는 오늘, 팬텀은 여제의 알현식이 아닌 이 정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여기도 오랜만이군."
"그러게요."
아무도 없어야 할 에레브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팬텀은 경계 태세를 갖추고는 뒤를 돌았다. 순간 팬텀의 손에서 케인이 떨어졌다.
"오랜...만이에요, 팬텀."
팬텀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아리아?"
아리아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팬텀은 여전히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 하고 있었다. 그는 아리아를 향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팬텀의 손에 그녀의 볼이 닿자 여태까지의 슬픔과 분노 등 모든 감정들이 복받쳐올라 자신도 모르게 눈에 뜨거운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이런 그에 아리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팬텀? 울어요? 괜찮아요?"
"당신 같으면 괜찮을 것 같아?"
"나라면 기쁠 텐데?"
외모하며 말투하며 표정까지도 아리아랑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팬텀에게 더욱 그녀를 확신시켜 주었다. 그녀의 볼에서 손을 떼며 카르트를 꺼내들었다. 아리아는 마치 이번엔 무슨 장난을 치려는 건가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카드는 어느 새 붉은 장미로 변해있었다.
"당신은 웃는 게 아름다워."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장미를 받아들었다. 장미 한 송이에 기뻐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팬텀은 더 이상 그녀를 배려하고 있을 수 없었다.
"아리아."
"네?"
아리아가 고개를 드는 순간 팬텀은 그녀를 껴안았다.
"저기 패,팬텀?"
"잠시 이대로, 그냥 이대로 있어줘."
아리아는 몸에서 힘을 풀었다. 팬텀은 안도하는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몇 분인가 흘렀다. 팬텀이 몸을 떼는 순간이었다. 팬텀은 피가 흐르는 배에 손을 갖다대며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아,아리아? 지금 무슨..."
"덜 움직이는 게 좋을 거에요. 칼 끝에 독을 묻혀놨어요."
팬텀은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자꾸만 입 밖으로 나오려는 피를 억지로 삼키고 있었다.
"그렇게 삼키면 고통스럽게 죽을 뿐이죠."
"너, 누구야?"
"어머, 이제 눈치챘나보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줄 알았어?"
변장이 풀리는 효과가 나며 팬텀 앞에 힐라가 나타났다. 힐라는 손에는 붉은 장미를 던지더니 팬텀 가까이 다가갔다.
"나는 이런 장미 필요없어. 너의 피로 물든 이 흰 장미를 원할 뿐이지."
팬텀 앞에 흰 장미를 떨어뜨리고는 힐라는 정원을 유유자적히 빠져나갔다. 그는 나가는 힐라를 노려보다 그녀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참았던 피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아리아, 어쩌면 잘 될 일인 걸까? 다시 당신을 만날 수 있어. 이제 이런 고통은 참지 않아아도 돼. 영웅은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우겠지. 스승님을 만나고, 그대를 만나고, 프리드네를 만나고 이 정도면 내 인생도 그리 값싸진 않았어. 좀만 기다려줘.'
알현식 중간에 기사단장들에게 시그너스를 맡기고 에레브로 돌아온 나인하트는 놓고 물건을 가지러 들어가다가 창 너머로 열려있는 정원의 문을 발견했다. 순간 어둠을 직감한 그는 정원으로 달려갔다. 정원 중간에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나인하트는 발견과 동시에 기사단장들에게 시그너스의 알현식을 중단시키러 달려갔다.
정원, 그 가운데에는
피로 물든 잔디와 붉은 장미 한 송이가 놓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