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정인
계사
달빛이 휘영청 밝은 밤이었다. 소녀는 달을 보며 서 있었다.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초조한 발걸음으로 뒷마당을 헤집어 놓았다. 구름이 달을 조금씩 가리었다가 다시 걷히었다.
“나를 기다리시는게요, 낭자?”
낯익은 목소리에 소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사내는 담장을 유유히 넘었다. 화려한 도포자락을 정리하며 소녀에게 다가온 그가 사람 좋게 웃었다.
“오늘도 놀리는 건 여전하시군요.”
“사람이 물었으면 대답을 해야지. 날 기다렸소?”
“그저 잠이 오지 않아 달빛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소녀가 얼굴을 떨구었다. 뺨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사내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고스란히 시야에 담았다. 무슨 얼굴을 하여도 곱지만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더 고왔다. 사내가 빈손에서 장미를 꺼내들어 소녀에게 건네었다.
“낭자는 웃는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리오.”
소녀는 그의 언사와 행동에 살풋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이내 얼굴을 굳혔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오물거리다가 겨우 말을 뱉어내었다.
“이제 여기 오지 마십시오.”
항상 듣는 말이기에 팬텀은 어깨를 으쓱했다.
“처녀단자를 올렸습니다, 부모님께서.”
팬텀의 움직임이 멎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두 사람 다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잎사귀들 때문에 겨우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인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둘의 시간은 잠시 멈추었다. 처녀단자라 함은 중전으로 간택되는 후보자에 이름을 올린 다는 뜻이었다. 팬텀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꼭 움켜쥐고 있는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아리아였다.
“정말 오지마세요, 이제는.”
“난 그대가 행복하길 바라오.”
“전 행복할 겁니다.”
팬텀이 아리아에게 다가가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아리아는 눈을 꼭 감고 그를 보려 하지 않았다. 팬텀은 한숨을 내쉬며 사라졌다. 그의 인기척이 사라지자 아리아는 눈을 감고 손에 들고 있던 장미를 바라보았다. 그 위로 눈물 몇 방울이 떨어졌다. 장미에 때 이른 이슬이 맺히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오랜 시간을 서있었다.
팬텀은 달빛 환한 길을 자박자박 걸었다. 먼저 청혼하는 것이 그리도 힘든 일이었던가. 자신의 안일함에 머리를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발걸음이 저절로 주색가로 향했다. 무엇에 이끌리는지 자기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채.
나라에 금혼령이 떨어졌다. 궁 근처로 형형색색의 꽃가마들이 무리를 지어 모이고 있었다. 가마에서 내린 노란 저고리와 붉은 치마의 아리따운 규수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입궐하고 있었다. 아리아 또한 같은 차림으로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가마에서 내렸다. 감정을 담고 있지 않은 눈은 초점 없이 앞을 향했다. 양반가의 딸로 태어난 이상, 원하는 사람과 혼인은 이미 일찌감치 포기한줄 알았다. 허나 그 밤을 보내고 나서 그녀 스스로 얼마나 안일한 생각에 빠져있었는가를 처절하게 느꼈다. 아리아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겨우 참아내었다.
마지막 관문인 삼간택(三揀擇)에서 3명의 처녀가 남는다. 이들 중에서 단 한명만 국모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나머지 2명은 후궁으로 들어가거나 평생을 과부로 수절하며 살아야한다. 어차피 내정자가 있다는 건 암암리에 알려진 사실. 2명은 정치적 희생양이 된다. 비단치마를 꼬옥 잡은 아리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느 쪽이든 행복한 삶을 바라는 건 무리다. 여기까지 온 이상은.
수수한 가마가 천천히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허름한 초가집에 도착하자 가마꾼들이 가마를 어깨에서 내렸다. 문을 열고 나온 여인은 쪽진 머리에 흰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가마꾼은 측은한 표정을 살짝 보였지만 이내 가마를 다시 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집에서부터 데리고 온 하녀는 거의 울기직전의 얼굴이었다.
“아가씨......”
“미안하구나.”
자신을 따라왔던 탓에 죄 없는 하녀까지 여기서 청춘을 허비하게 될 것이다.
“너는 네 살길을 찾아 가렴.”
“아가씨!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리아가 힘없이 웃었다. 방에 들어가서 일단 여독부터 풀자꾸나. 그녀의 목소리가 마당에 자그맣게 울리었다.
궁에서 눈치 보는 삶을 살다가 정업원(淨業院)에 들어가서 여승으로 늙어 죽는 게 나은 삶일까 아니면 권력에서 낙오된 아비 덕에 변변한 후궁자리 하나 앉지 못하고 청상과부로 살다 죽는 게 나을까. 오래 생각할 필요는 없었지만 둘 다 자신의 의지로 이뤄지는 일은 아니라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흐릿한 촛불에 의지해가며 한땀한땀 바느질하던 아리아가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인기척이 없는 밤. 달이 떴을까.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작은 농에서 책 한권을 꺼냈다. 평범한 소설책이었지만 사이에 말려 놓은 장미를 꽂아 놓았다. 장미향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만지면 부셔질까 아리아는 조심스럽게 장미를 쓸었다. 그녀는 책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밤바람이 제법 찼다. 하늘을 보니 보름달이 떠있었다. 아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품에 있던 책을 더욱 세게 안았다.
“부디 월하노인에게 하소연하여.”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다음 생에는 우리 부부 바꾸어 태어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뒷 구절을 따라 읊었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시.
“나는 죽고 그대만이 천리 먼 곳에 살아남아.”
“그대에게 이 슬픔 알게 하리라.”
마지막 구절은 사내가 대답하였다. 눈물이 계속 비저 나왔다. 달빛을 등지고 선 사내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대는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고 했지.”
“.......”
아리아는 말이 없었다.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 아니라 대답 할 필요가 없었기에.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아리아도 품에서 책을 놓지 않은 채 자신의 손을 그에게 뻗었다. 이제는 가문도 주위의 눈치도 보지 않은 채 오롯이 아리아로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순간이었다. 달빛이 무르익는 밤은 아름다웠다. 두 연인을 비추는 달빛은 두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