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뭐로 하지★
한율해
달빛이 은은하게 테라스에 부서져 내렸다. 소매 속에 카드 한 장을 숨긴 채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섰다. 분명 기척을 없애고 접근했건만 아리아가 풉,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살짝 떨궜다. 특유의 우아하면서도 맑은 목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울려퍼졌다.
“오랜만이네요, 팬텀.”
“눈감아주는 미덕을 좀 발휘해주면 안 될까, 아리아 황제.”
“그러기엔, 너무 기다림이 길었네요.”
아리아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달빛에 은은하게 빛나는 금발이 밤공기에 살랑거리다가 다시금 차분하게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신비로운 물빛을 담은 두 눈동자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생명의 위협이 느껴졌다. 저 눈빛을 안다. 저 표정을 안다. 살기 위해 손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손에 들려있던 카드가 순식간에 장미 한 송이로 변했다.
“당신은, 웃는 얼굴이 가장 잘 어울린다니까.”
“그래서 웃고 있잖아요. 이렇게.”
“...그, 그러네.”
선택지 1번, 능글맞게 넘어간다...가 튕겨져 나왔다.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선택지 2번, 도망친다. 선택지 3번, 공격한다.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았다. 아아, 난 어쩌다가 황제랑 사귀게 되어서 이 고생이지. 가난하고 착한 전형적인 여주인공이랑 연애를 했다면 뱀가죽 가방 하나로 잘 넘어갔을 텐데 말이지.
“왜 이렇게 연락을 안 했어요?”
“그야... 매일같이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느라 피곤했을 당신을 생각해서 그런 거지.”
나름 멋있게 미소도 지어보이며 그렇게 말해보았지만 아리아의 눈빛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웬만한 멘트로는 오글거림조차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너무 작업멘트를 남발하면서 연애를 했나보다. 아리아는 여전히 냉랭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면서 입으로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서웠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내어 다시금 입을 떼었다.
“하아....... 당신이란 여자도 너무하군. 허세와 능글맞음은 괴도의 미학인데 말이야.”
“차분함과 정의로움은 황제의 미덕이죠.”
“...미안. 내가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데요?”
또 시작이다. 늘 느끼는 거지만, 한 제국의 황제라고 해도 역시 여자는 여자다. 상황이 골치 아프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겠군. 깊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페르소나를 벗었다. 그리고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입을 떼었다.
“▶ (아리아에게 내가 잘못한 점들을 소상하게 전해주었다.)”
“...자꾸 개수작 부릴 건가요?”
“▶ (아리아에게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자세히 전했다.)”
아리아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곧 아까보다 살짝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화가 나서 목소리가 높아진 건 아니었다. 말 속에는 약간의 기대감도 묻어나오고 있었으니.
“좋아요. 계속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죠?”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똑똑한 여자랑 연애하면 이게 피곤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으니.
“! 수행 가능한 퀘스트”
“저런.”
“▶ 멋진 중2 루미너스”
뭔가 무시무시한 퀘스트 제목이다. 하지만 저 퀘스트를 완료는 것 외에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겠지. 조심스럽게 퀘스트를 건드려보았다.
“지금 에타광장에서 빛과 어둠의 축제가 한창이에요. 그 곳에서 루미너스라는 마법사를 찾으세요. 그리고 그 분으로부터 순수함 버프를 받아오시면 돼요.”
“...뭘 받아오라고?”
“순수함 버프요.”
“그런 게 있어...? 아니 그 뭐시당가... 포틱 메디테이션이라든가 매직 부스터라든가.......”
“사전에 특별히 부탁을 해야만 가능한 버프라서 잘 모르실 거예요. 그럼, 거기서 뵐게요.”
그렇게 퀘스트 전달이 완료되고, 아리아가 자리를 떴다. 축제에 갈 준비를 하려는 것이리라. 나는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뜬금없이 빛과 어둠의 축제에 가서 루미너스를 찾으라니. 그리고 순수함 버프를 받아오라니. 내가 얼마나 순수한 사람인데!
깊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차분히 생각을 시작했다. 일단 에타광장까지 가야 한다. 걸어가기 힘든 거리는 아니었으나, 터덜터덜 걸어가면 간지가 나지 않으니 다른 운송수단이 필요했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커다란 배같은 게 하나 있으면 좋겠군. 나중에 마음의 여유가 좀 생기면 작업에 착수해야겠다. 일단은 아쉬운 대로 마차나 하나 잡아타야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서는 발을 떼었다.
* * *
“에타광장에서 열리는 축제는 처음이셔유?”
구수한 사투리로 마부 아저씨가 물어왔다. 물론 저게 첫 질문은 아니었다. 말도 많고 정도 많은 전형적인 시골 아저씨. 이런 생각, 실례인 건 알지만, 귀찮은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가식을 발휘하여 싱긋 미소를 지어보이고서는 입을 떼었다.
“축제를 싫어해서요.”
“젊은 분이 왜 그러신대유? 동행할 아가씨가 없어서 그러시나?”
“...이유는 다르지만 동행할 아가씨 때문인 건 맞네요.”
대답을 웅얼거리고서는 그대로 좌석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자는 척을 하면서 잠입할 계획이나 세워야지. 어떻게 잠입하지? 역시 변장을 해야 할까. 아니면 미끼로 돈뭉치를 던져서 한 눈을 파는 사이에 요리조리 피해가면.......
“곧 내리시면 돼유. 혹시라도 개막식을 놓칠까봐 가장 빠른 입구로 왔어유.”
마부 아저씨의 말이 생각의 흐름을 끓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는 다시금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보이며 금화 한 닢을 꺼냈다.
“고맙습니다.”
말도 많고 사람을 귀찮게 하지만 그래도 역시 시골 사람들이 인심이 좋다. 길을 헤매느라 개막식을 놓칠까봐 바로 들어갈 수 있게 이렇게 제일 빠른.......
찰칵, 찰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빛이 터져나왔다. 모자를 눌러 써 얼굴을 가릴 새조차 없었다. 눈으로 들어오는 빛의 양을 줄여보기 위해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사실상 전부였다.
“잠깐. 누구지, 저게?”
“누구 세컨드 아니겠냐. 잘생겼잖아. 일단 찍어!”
기자들의 대화를 듣고 나서야 내가 서있는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아차렸다. 그 이름도 위대한 레드카펫. 혹시라도 개막식을 놓칠까봐 가장 빠른 레드카펫 앞에 내려줬구나. 개새끼. 목격자가 너무 많아서 도망치기도 곤란했다. 그래서 그냥 누구 세컨드인 척을 하기로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남아있는 생각을 포기해야지.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늦었군. 세계 최고의 괴도라는 녀석이 시간도 훔치지 못하다니.”
레드카펫 위를 우아하게 걸을까 발랄하게 걸을까에 대한 무의미한 고민을 하는데 누군가가 내 뒤에서 귀에 대고 그렇게 속삭였다. 카메라 셔터의 소리가 한결 더 거세어졌다. 웅성거림 역시 들려왔다. 분명 저 사람이 루미너스인 그런 뻔하디 뻔한 전개겠지. 이 작가가 그렇지 뭐.
“그, 그럼 저 사람이 루, 루미너스님의...!”
“루시아님은...! 루시아님은 버린 거야?”
“잘 어울린다! 누가 공일까?”
마지막 말을 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붉은 머리칼에 초록색 눈이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마음 같아서는 멱살을 잡아 올리고 ‘공같은 소리하고 있네’라고 하고 싶었지만 나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한 채 그 아가씨 앞으로 다가섰다.
“그 이 허리놀림이 예술이에요.”
“그런...!”
아가씨의 격한 반응이 재미있어서 뭔가 더 이야기를 하려는데 루미너스가 내 목덜미를 뒤에서 홱 낚아챘다. 그리고서는 그대로 레드카펫을 뚜벅뚜벅 걸어갔다. 카메라 셔터의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나는 윙크도 하고 손도 흔들어주며 루미너스에게 끌려갔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대체 작가는 무슨 생각인 거지.
* * *
“얼른 꺼져.”
진심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지은 채 루미너스가 나를 바닥에 패대기치며 그렇게 말했다. 어이가 없었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먼지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선 녀석을 벽으로 훅 밀어붙였다.
“미안하지만, 난 그 순수함 버프라는 걸 받기 전까지는 돌아가질 못하거든?”
“.......”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될까? 샌님.”
솔직히 말하자면, 녀석이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는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희수무레한 마법사 녀석이 피식, 비웃음을 흘리는 게 아닌가. 황당함에 눈만 껌뻑이고 있는데 녀석이 입을 떼었다.
“정말 멍청한 녀석이군.”
“다짜고짜 멍청하다고 하면 내가 더 멍청해지잖아? 설명이라도 좀 해주지?”
“아직도 모르겠냐?”
나를 두 손으로 가볍게 밀치며 녀석이 그렇게 말했다. 초록빛이 도는 옅은 푸른색의 영롱한 두 눈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너 엿 먹이려고 그런 거야. 순수함 버프같은 게 어디 있냐?”
녀석이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금 나를 비웃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허무한 결말일 줄이야. 아아, 난 뭐 때문에 레드카펫 위에서 커밍아웃을 한 걸까. 루미너스가 이어서 내뱉은 말에 다리의 힘이 쫙 풀렸다.
“? 완료 가능한 퀘스트”
* * *
“♥ 획득!!”
“.......”
“☞ 경험치 1400 exp +60(감성 추가 경험치) exp”
아리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보상을 퍼다 주었지만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영혼이 빨려나간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는 만족스러울 정도로 내게 엿을 준 모양이었다. 표정이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밝았다.
“수고 많았어요.”
“알면 상이라도 좀 줘.”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거예요?”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알면서 왜 그러실까.”
아리아가 내 말에 작게 웃음을 흘리더니 내 볼에 살짝 입을 맞춰주었다. 그리고서는 나를 침대 위에 앉혀놓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잠깐만 기다려요.”
...어라. 아싸. 아싸. 고생 끝에 드디어 낙이 오는 건가. 나는 어디론가 향하는 아리아의 관능적인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신난다아아...!
“짠.”
아리아의 목소리와 함께 차갑고 단단한 무엇인가가 내 뺨에 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아리아가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양 손에 구구콘을 들고 있었다. 나는 구구콘과 아리아를 몇 번이고 번갈아보다가 입을 떼었다.
“이게... 뭐지?”
“뭐긴 뭐예요. 구구콘이죠.”
“...내가 말한 상은 이게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잖아?”
“그건 알지만, 안 돼요. 주최자가 수위 조절하라고 했단 말이에요.”
‘...에타 죽어라.’
나는 주최자를 향해 마음속으로 작게 욕을 내뱉고서는 구구콘의 포장을 깠다. 초콜릿과 캐러멜이 강렬하게 어우러진 단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맛있긴 했다. 말없이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문득 든 의문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떼었다.
“아리아.”
“네?”
“근데 갑자기 이걸 왜 먹는 거지?”
“일종의 싸인같은 거예요. 이 글이 한율해라는 어느 미친년의 글이다, 하는 표식.”
“.......”
“결말은 구구콘.”
“...그렇구나.”
그냥 생각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다시금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물었다. 테라스를 감싸던 은은한 달빛은 사그라들고, 여명이 하늘에 번져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묘사를 해봤자 이미 이미지를 쇄신하기는 늦었겠지. 읽느라 고생들 하셨다. 다른 존잘분들의 글과 그림으로 머릿속을 좀 정화하시길.
달콤한 아이스크림만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