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산消散
엘
※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이야기는 모두 가공된 것이며 실제 게임 내 스토리와는 일체 관계없음을 공지합니다. :)
-푸드덕, 푸드덕…
아침의 새 하늘에 날아오르는 갈매기의 소리는 언제나 활기차다. 떼를 지어 V자로 날아가는 그 모습은 그들의 유대감이야말로 세상 어느 생물도 무시 못 할 경지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한 그들의 향響은 메이플 월드를 날아다니는 호화선-크리스탈 가든에까지도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으럇차하고 잠에서 깬 목소리가 하얀 침구 사이에서 삐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침대에 누워있던 장신의 남자가 일어났다. 새하얀 피부에 제법 늘씬한 몸매를 가진 남자였다. 목에 닿을 정도로 약간 긴 그의 머리카락은 연한 금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메이플 월드의 다섯 영웅 중의 한명이자 바로 이 크리스탈 가든의 주인-팬텀이었다.
팬텀은 아직 힘이 덜 들어간 다리를 뚜벅뚜벅 움직여 침실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자수정을 박아 넣은 것 같은 깊은 자紫색이었다. 젊은 날에 비해 꽤나 세월이 흐른 탓에 그의 작은 얼굴에는 조그마한 주름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그 영롱한 눈빛은 젊은 날의 그것과 변함이 없었다.
“주인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음, 이미 일어나 계시군요.”
발랄한 노크소리와 함께 앳되어 보이는 청년이 말쑥한 연미복 차림으로 팬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현재 이 크리스탈 가든의 집사-알렉시아였다.
팬텀과 오랫동안 동고동락했던 집사-알프레드는 몇 년 전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주인을 심려했다. 크리스탈 가든의 사용인 모두와 팬텀은 그의 죽음을 마음속으로 안타까워했다.
“알렉시아. 아침 식사가 끝나면 조용히 내 방으로 와 줘.”
“에? …알겠습니다.”
팬텀은 살짝 당황한 것 같은 기색을 보인 알렉시아를 보고 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는 여전히 미남이고 귀貴인이었다. 알렉시아는 식당을 향해 가는 주인의 뒷모습을 보고 무언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똑똑
“주인님, 알렉시아입니다.”
“들어와.”
끼익-하는 작은 문소리와 함께 알렉시아가 팬텀의 방으로 들어왔다. 팬텀은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가까이 와봐, 알렉시아.”
알렉시아는 팬텀이 앉아있는 책상 앞까지 다가갔다. 팬텀은 더 가까이 오라며 작게 손짓했다.
“알렉시아. 지금부터 너한테 하는 말은 모두에게 비밀이야. 지켜줄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팬텀은 허리를 굽힌 알렉시아의 귀에 무엇이라고 작게 속삭였다. 알렉시아는 그 내용에 흠칫 놀라 보였지만 이내 침착하게 팬텀의 말에 수긍하였다.
“주인님, 정말로 이렇게 하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아아. 문제없어.”
알렉시아는 금고에서 짐을 옮기고 있는 일꾼들과 유유한 미소를 짓고 있는 팬텀의 모습을 번갈아 보면서 마음속으로 어리둥절했다. 물론, 자신이 주인의 일에 왈가왈부할 권리는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알렉시아는 그저 묵묵히 집사로서의 일을 할 뿐이었다.
“잠금장치는 어쩌실 겁니까?”
“…….”
팬텀은 알렉시아의 말을 듣고 돌연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가 자주 드러내지 않는 진지함이었다.
“큰 자물쇨 단단히 잠그고. …열쇠는, 어디 큰 바다 같은 데에 버려.”
“…알겠습니다.”
알렉시아는 오늘따라 자신이 유난히도 말에 뜸을 들인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 군말 없이 일꾼들에게 자물쇠를 채우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그 순간……
‘……?!’
“주인니임-!!”
그의 비명이 팬텀의 등 뒤에서 일순 허망한 메아리를 만들곤 사라졌다.
팬텀은 텅 빈 금고를 보며 짐을 없애니 제법 고요한 장소가 된다는 생각을 했다. 공허한 그곳에는 그가 걸어 다닐 때 마다 또각또각 울리는 부츠소리 빼곤 아무런 잡음도 생기지 않았다.
지금의 팬텀의 뒷모습은 그가 젊었을 때와 구별이 안 갈 정도로 비슷했다. 그는 허리도 안 굽고 나잇살도 그다지 붙지 않았으며 키도 줄지 않아 과거의 옷을 입어도 멀쩡했다. 팬텀은 항상 자신이 입고 다니는 ‘그 복장’을 선호했다. 금실로 수놓아진 흰 슈트에 푸른 망토, 검은 부츠, 화려한 깃이 달린 페르소나…….
“아리아.”
팬텀이 또렷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몇 번을 불러도 부족하고 덧없는 그 이름을.
그의 앞에는 커다랗게 그려진 아리아의 초상화가 곱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건조하게 유지된 금고 안에서 수십 수백 년 줄곧 보관된 초상화는 조금도 감색되지 않았다. 팬텀은 조심히 다가가 장갑을 벗은 맨손으로 초상화를 어루만져보았다. 까글까글한 그림의 표면과 자신의 손 주름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그어진 잔선들을 보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바보 같이 웃고 있어. 참….”
그는 초상화의 얼굴로 손을 가까이 가져갔다. 따뜻한 살결은 아니지만 평생토록 순결한 소녀일 그 얼굴이 그 무엇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문득 아련한 과거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기 시작했다. 스카이아의 소문을 듣고 그녀를 만나러 오고, 장미꽃을 주며 그녀를 위로했었고, 윙마스터에 의해 그녀가 죽었고…….
팬텀은 아리아가 사랑했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영웅이라는 타이틀을 몸소 어깨에 걸치고 살아왔다. 동료들과 시간의 신전에서 검은 마법사에게 대항했고, 봉인을 당해 수년 후 부활한 이래로도 연합의 일원으로서 그의 최선을 다했다. 그녀가 한 말을 한 시도 잊은 적은 없었을 거라고 그는 자부했다. 블랙 헤븐 전쟁 때 철전지 원수였던 오르카를 보고도 그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기를 자의로 거부했었다. 아리아의 유언, 아리아의 복수-라는 핑계까지도 팬텀은 초월하고자 노력했다.
“이젠, 검은 마법사도 뭣도 없는데 말이지-.”
각설하고 말해서, 팬텀이 지금 있는 이 금고만큼은 아니지만 현재 메이플 월드는 일차적으로 고요한 상태였다. 물론 아직도 각 마을 마다 갖고 있는 고유의 트러블이야 어찌 손 댈 수 없는 문제들이지만, 지금 길 가는 어린 아이들에게 검은 마법사라든가 블랙윙이라든가 혹은 다섯 영웅이라든가 하는 단어들을 거론하게 되면 세대 차이가 느껴진다고 할 정도로 먼 이야기가 되어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사랑했던 그녀가 진정으로 바라던 세상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지만 말이다.
“난 이렇게 늙어버렸는데 말이지? 그쪽만 계속 창창하게 어려서야 원-, 내가 로리타 콤플렉스도 아니고.”
그는 듣는 이도 없을 허망한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하고 싶은 말들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명확하게 표현되지가 않았다.
그저, 수백 년 전에 봤던 그 소녀와 다시 만나고 싶었다.
-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멋져요.
“……아리아?!”
기대도 안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팬텀은 놀란 마음에 고개를 이리저리 저었다. 분명히, 그녀의 목소리였다.
- 팬텀.
다시 한 번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팬텀의 귀가 아닌 머릿속에서 ‘직접’ 들려왔다. 그것은 귀로 전해지는 음성보다도 그의 안을 깊게, 동시에 포근하게 파고들었다. 그 놀라움을 넘어 감격스러운 기분에 팬텀은 그대로 두 눈을 감았다.
오랜 세월 동안 그리워했던 그녀가 서있었다.
- 보고 싶었어, …아리아.
- …….
그녀는 팬텀의 말에 그저 작게 수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두 눈 안의 세계에서 팬텀은 젊었을 때의 잘생긴 남자로 변해있었다. 한 번도 제대로 닿아보지 못한 그녀를 팬텀은 힘껏 끌어안았다. 좁은 어깨를 가진 아리아는 팬텀의 몸에 딱 맞추어진 것처럼 쏙 들어왔다.
- 그러고 보니 팬텀, 손에 그것은?
- 아, 당신의 일기장이지.
- 그, 그걸 왜 당신이 가지고 있는 거예요?
- 왜긴 왜야. 옛날에 시그너스가 줬었거든.
- …읽었나요?
- 당연하지, 누구 일긴데.
팬텀은 낡은 일기장을 자신 있게 아리아에게 건네주었다. 아리아는 살짝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일기장을 받아 들었다.
- 그런데 이것을 왜 가져왔나요?
- …….
- 스카이아는, 안 가져왔군요.
아리아가 스카이아를 언급하자 팬텀은 조금 머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가 끝내 스카이아를 가져오지 않은 것은 이 세계에 아리아의 흔적을 하나 정도는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팬텀은 아리아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잊히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아리아라는 이름의 여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오랜 역사에 심어지기를 바랐다. 낡은 일기장 속의 인간 아리아를 기억하는 것은 자기 한 명으로도 족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 …피곤해.
- 오랜만에 만나서 하는 소리가 겨우 그건가요?
- 평생 이 일 해 봐. 역시 나여도 질리긴 질리는군.
- 슬슬, 그만 둘 때가 되었다는 건가요?
- …그런 셈이지.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는 팬텀의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고 입 꼬리는 완연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의 팔에 안긴 아리아도 한없이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돌연 팬텀이 아리아의 어깨에 둘렀던 팔을 풀고선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아리아는 살짝 놀란 눈치였지만 이내 다른 한 손으로 팬텀과 손을 맞잡았다. 마주 잡은 손을 본 팬텀이 한껏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럼 가볼까, 아리아?
- 어디로요?
- 글쎄…. 어디든지, 당신이랑 함께라면.
- 후훗, 당신답네요.
두 손을 꼭 잡은 두 사람은 천천히 그 ‘어딘가’를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씩 나아갈 때 마다 깍지를 낀 손가락들이 점점 더 강하게 얽혀왔다. 마치 본래 그 손의 주인이 상대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백 년 전 그 날과 같은 예쁜 밤하늘의 달이 두 사람을 비추어주고 있었다. 억겁의 시간 동안 잡지 못한 온기를 거머쥐고 있는 팬텀은 지금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남자가 되었다. 그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진 모습으로 마음껏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끌어안았고 마음속으로만 그려왔던 수만 번의 입맞춤을 그녀와 나누었다.
팬텀과 아리아가 다시 만난 그 날의 달이 지평선 아래로 넘어갔다. 새로이 뜬 붉은 태양이 동굴의 조그마한 틈새로 들어와 그가 다녀간 마지막 금고의 문을 살짝살짝 비추고 있었다. 금고문에 달린 금박이 화려한 자물쇠가 햇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팬텀이 전날 알렉시아에게 부탁한 대로 그 자물쇠의 열쇠는 아마 아무도 못 찾을 어딘가에 버려졌을 것이다.
영원히 닫힌 그 금고와 함께, 괴도 팬텀이라는 이름을 떨쳤던 남자 또한 메이플 월드에서 종적을 감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