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곰발
00
“잘 어울리네, 아리아.”
그의 말에 그녀는 돌아보았다. 머리카락과 부드럽게 얽어 늘어뜨린 흰 구슬장식, 그 아래로 눈부시도록 흰 드레스가 흘러내려 그의 발치에 닿았다. 곱다, 곱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에 닿아 부서진 빛가루가 금빛으로 날렸다. 그 날리는 빛가루보다 더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잘 어울려요, 팬텀.”
그녀는 그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그의 어투를 흉내내며 말했다. 그는 그런 그녀를 향해 장난스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아름다우신 아가씨?”
“좋아요, 훌륭하신 신사님.”
그가 내민 손 위에 그녀의 손이 살포시 얹혔다. 서로는 서로의 손을 놓치지 않도록 힘을 주었다. 내민 손에도, 그것을 맞잡은 손에도 그들의 변치 않는 마음을 상징하는 작은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01
하마터면 아리아를 영원히 이 세상에서 보지 못할 뻔했다. 팬텀은 숨을 몰아쉬었다. 망할 녀석들. 그는 아리아를 죽일 뻔했던 그들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래도 아리아를 이렇게 그들로부터 구해냈으니 다행이다. 팬텀은 그의 품 안에서 작은 숨을 내쉬는 아리아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너를 잃지 않아서 다행이야, 작게 속삭인 그 말이 닿았을까.
아리아의 몸에 별다른 상처는 없었다. 다행이었다. 그녀가 자신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을 때 팬텀은 딴청을 피우며 모르는 척 했다. 누구의 소행인지 말했다가는 살인은 안 돼요, 라며 그에게 신신당부하며 그의 복수를 막으려 했을 테니까. 그냥 모른다고 슬쩍 넘기자 아리아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녀는 이전처럼 에레브를 다시 통치해 나갈 수 있었다. 너는 현명하고 지혜로우니 분명 잘 해낼 거라고, 팬텀은 아리아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했지만,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또다시 누군가가 습격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할 수만 있다면 아리아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아리아, 괜찮겠어? 매일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지만 말고. 실제로 네가 괜찮을 수 있어?”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아리아가 고개를 갸웃, 하며 답하자 팬텀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 아가씨를 어쩌면 좋담, 이마를 짚는 팬텀에게 아리아가 넌지시 말을 던졌다.
“이번에 궁에서 호위병을 뽑는데, 거기에 한 번 지원해 보는 건―”
“싫어, 그건 절대 싫어!”
아리아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튀어나온 팬텀의 대답에 아리아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팬텀은 내가 어찌되든 상관없나요?”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아리아. 내가 몇 번이나 말했던 것 같은데? 무언가에 속박되는 건 질색이라고.”
“그러니까 팬텀은 나의 안위보다 팬텀의 자유가 더 중요한 거죠?”
“아,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아리아, 좀.”
팬텀의 말에 아리아는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는 거야? 라고 말하는 팬텀의 표정을 본 아리아는 급기야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저기, 아리아? 난 진지한 얘기 중이었는데.”
“아, 미안해요, 팬텀. 그치만 너무 웃겨서…….”
“하아,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진짜 어쩔 거야?”
간신히 웃음을 멈춘 아리아는 고개를 살짝 들고는 팬텀의 표정을 살폈다. 나름 진지해 보이는 얼굴이었기에 아리아는 슬쩍, 다시 그를 떠봤다.
“호위병은, 싫은 거죠?”
“당연하잖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들려온 답변에 아리아는 한숨을 쉬며 되물었다.
“그럼 어쩌시려구요?”
“글쎄―. 생각해 봐야지?”
입에서 나온 말은 그랬지만, 눈에 띄게 올라간 그의 입꼬리를 보니 이미 답을 찾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반쯤 예상하면서도 그의 입을 통해 듣고 싶은 마음에 아리아는 그를 독촉했다.
“어떤 방법이 떠오르시나요?”
팬텀은 그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지으며 양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거지, 네 곁에서 평생 널 지켜줄 수 있는 방법.”
02
심해.
깊은 바다 한 가운데에 홀로 떨어져버렸다. 사람의 기척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위쪽에서 나를 향해 비추는 가느다란 햇빛 한 줄기 뿐이다. 부서진 산호들이 반짝이며 위로 올라온다. 숨이 막혀온다. 누가, 누가 좀 이 곳에서 나를…….
손을 뻗은 순간 닿은 것은 그였다. 그는 답답한 그곳에서 나를 바깥으로 끌어올려주었다. 그가 들려주는 바깥 이야기,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흥미로웠다. 그 놀라운 세상을 내 눈으로 보고 싶다는 새로운 욕망이 내 안에서 샘솟기 시작했다.
한 번은 그를 따라 에레브를 떠나는 비공정에 몸을 실었다. 그는 내가 여제인 것을 몰랐으므로, 편하게 그를 따라 세상을 돌아다녔다. 놀라운 세상, 지금까지 이 세상을 모르고 지냈다는 것이 너무나도 억울했다.
다시 돌아가려는 비공정에 승선하려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재빨리 손으로 가린 그 눈물을 그는 보았나 보다. 조용히 다가와 내 눈물을 닦아준 그는 귓가에 속삭였다. 다음에 또 데려와 줄게.아마 그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그’ 라는 사람을 마음에 담게 된 것이. 슬플 때면 그가 눈물을 닦아줄 때 내 뺨에 닿았던 그 손가락이 떠오르고, 괴로울 때면 다음에 다시 데려와 준다는 그의 속삭임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게 고된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왔다.
그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진 어느 날. 소중히 지니고 있던 보석 스카이아에 신비로운 소문이 있다고, 시중을 드는 하녀에게 조용히 속삭여 주었다. 곧 에레브 전역, 메이플 월드 전역에 퍼지게 된 그 소문을 듣고 역시나, 그가 찾아왔다.
“어서 오세요, 괴도 팬텀.”
“넌…….”
그때 그 놀란 그의 표정이 어찌나 기억에 남는지. 아직도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선연히 떠오른다. 그는 곧 웃으며 말했다.
“이런이런, 에레브의 여제님은 장난기가 많은 분이시구나?”
그것이 여제 대 괴도로서의 첫 만남. 나는 조금씩 조금씩,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나의 마음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곧 행복해졌다. 내가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이가, 이런 이라서.
“네?”
그렇기에, 이런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오히려 기쁨에 미소가 절로 나오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겉에서 보는 나는 침착하고 당당한 한 명의 여제였다.
“아……참, 아무리 나라도 이런 말을 두 번씩이나 하면 부끄럽다고. 평생 네 곁에서, 널 지키고 싶다고. 함께해 주겠냐고.”
“알아듣기 쉽게 말해 주시겠어요?”
괜히 그를 놀린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지 않았다. 이미 서로가 알고 있다. 그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불쾌해하지 않는다. 망설이던 그가 마음 속 안에 늘 간직해왔으리라 믿는 한 마디를 간신히 끌어올렸다.
“―나랑 결혼, 해 주겠어, 나의 아리아?”
이제는 보일 수 있다. 물기를 머금은 눈으로, 답한다.
“물론이죠, 나의 팬텀.”
03
나와 아리아 때문에, 에레브가 뒤집어졌다. 사람들이 아주 다 난리가 났다. 아리아는 이럴 때만 보이는 여제의 권한을 한껏 부려 결혼―아니, 아직 이 단어는 익숙치 않다. 떠올리기만 하면 내가 했던 그 엉성한 고백……아니, 이것도 아직 안 된다. 그냥 관련된 모든 걸 떠올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리아만 빼고―을 성사시켰다.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처음 내가 괴도인 것을 알고 그녀가 놀랐고, 후에 그녀가 황제인 것을 알고 또 내가 놀랐다. 서로 그렇게 한 번씩 속이며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여기에까지 이르렀다.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운 그녀는, 내 손을 맞잡고 곁에 있다. 언제나 곁에 있다. 늘 곁에 있어줄 테니, 아리아, 부디 너도 늘 내 곁에 있어주기를. 서로 눈을 맞췄다. 그리고 부드럽게,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축복하는 종소리, 흩날리는 꽃잎이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우리 둘을 축복한다.
*
“아리아, 나는 세계와 너, 그리고 우리와 같은 수많은 연인들의 사랑을 지키고 싶어.”
“……네? 그건 저도 물론 그래요. 그러나 우리가 모두를 지킬 수는 없을 거에요.”
“아니, 지킬 수 있어, 아리아. 네가 허락만 해 준다면…….”
“팬텀? 아까부터 왜 그래요? 무슨 부탁을 하시려고?”
“내가, ‘영웅’ 에 합류해도 될까?”
드디어 떨어진 한 마디에 크게 눈을 떴다. 돌아오기만 하면, 돌아와서 내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고, 몇 번이고 되풀이한다. 그러나 그 때부터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어쩌면 그것은 확신이었다.
결전의 날, 나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나가려는 그를 붙잡고 스카이아를 건네주었다. 푸른 보석, 나의 눈동자 빛깔이라며 팬텀이 말했던 그것. 그것을 그에게 전해주어 어디에 있든 나와 함께하고 있다, 생각하라고 했다. 스카이아에는 그는 모르는, 작은 마법이 걸려 있다. 나의 육신이 사라져도 나의 영혼만은 그리로 향해서 사랑하는 나의 연인을 평생토록 지켜줄 수 있는……나의 영혼을 부르는 주문.
그것이 부디 내가 죽어도, 그가 죽어도 서로의 영혼을 불러 하늘에서도 맺어질 수 있게 하기를. 내가 그를, 그가 나를 평생토록 지켜보며, 서로의 곁에 있을 수 있게 하기를.
그를 시간의 신전으로 보내고, 다른 대륙으로 향하는 비공정에 오르며 간절히 빌어 본다.
륀느 여신이시여, 우리에게 기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