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무도회
곰팡이균
밤이 깊어갈수록 성 앞에 도착하는 마차의 수는 점점 더 많아졌다. 젊은 황제의 탄신일을 축하하는 가면무도회는 자정이 넘은 시간에서야 그 막을 올렸고 젊은 남녀들은 앞 다투어 연회장을 찾았다. 화려한 드레스와 오색으로 빛나는 조명들, 향긋한 샴페인 향이 가득한 이곳에서 다들 얼굴을 반쯤, 혹은 반 이상 가린 채 오늘 밤 자신을 즐겁게 해 줄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젊은 황제 역시 자신을 따르는 대신들과 호위무사들을 모두 물리고 홀로 가면을 쓴 채 연회장으로 나온 참이었다. 젊은이 특유의 패기와 어찌 보면 지나치다고 말 할 수 있는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젊은 황제는 오늘 열린 가면무도회를 톡톡히 즐길 생각이었다. 황제를 상징하는 표식이 달린 연미복 대신 일반 귀족 남성들이 즐겨 입는 연미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마지막으로 깃털 장식이 달린 푸른 가면을 쓰는 것으로 자신을 완벽히 감추는 데 성공했다.
“아가씨, 나와 함께 한 곡 하시겠어요?”
부담 없이 귀족가의 레이디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이 남성이 제국을 포함한 주변 제후국들까지 손가락 하나로 뒤집어엎을 수 있는 황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오늘의 가면무도회에서 단지 푸른 가면을 쓴 어느 귀족의 자제 ‘팬텀’이었다. 그의 변장을 도운 늙은 시종만이 애써 침착하게 마음을 다스리며 황제께서는 일찍 처소에 드셨다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치기어린 황제는 시종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어여쁜 귀족 아가씨와 한 곡 출 생각에 여념이 없다.
연달아 나온 왈츠 두 곡을 각각 다른 아가씨와 즐긴 황제가 잠시 음악이 멈춘 틈을 타 샴페인 한 잔을 집어 들었다. 얼굴을 가렸는데도 그 화려한 언변은 숨길 수 없어 금세 여성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황제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새들의 지저귐 같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샴페인으로 목을 축였다.
황제의 시선 끝에 한 여성이 걸린 것은 그 때였다.
지나친 화려함과 진한 화장을 한 대부분의 여성들과는 달리 수수한 하늘색 드레스에 간단한 머리장식을 한 아가씨는 전혀 긴장한 내색 없이 연회장을 살피고 있었다. 차분한 금발과 그 모습이 잘 어울리는 여성이었다. 그녀가 쓴 흰 고양이를 모티프로 제작한 가면이 조명을 받아 반짝였지만 보석이나 별 다른 장식이 없어 혼란한 연회장에서 그렇게 눈에 띠는 모습은 아니었다. 혼기가 찬 귀족가의 아가씨들이라면 배우자 후보로 질리도록 보아온 황제였다. 그녀가 누군지 모를 리 없었다.
“아가씨들, 잠시 실례할게요.”
매너 있는 손짓과 웃음으로 여성들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자리를 빠져나온 황제가 고양이 가면을 쓴 여성의 주위를 기척 없이 맴돌았다. 고양이 가면을 쓴 여인의 흰 손이, 백작가의 안주인이 드레스에 달고 온 붉은 루비를 슬쩍 건드릴 때, 황제는 들고 있던 샴페인 잔에서 손을 뗐다.
챙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놀란듯한 여성의 작은 비명이 홀을 울렸다. 바닥으로 떨어진 유리잔은 산산조각으로 흩어졌고, 고양이 가면을 쓴 여성은 붉은 루비의 주인의 비명에 놀라 빠르게 손을 자신의 드레스 뒤로 감추었다.
“오, 실례했습니다. 유리조각에 다치시진 않으셨나요?”
황제는 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 숙여 사과했다. 조금 당황한 얼굴의 백작부인은 황제의 정중한 사과를 받고 괜찮다며 작게 미소로 답했다. 곁눈으로 슬쩍 본 흰 고양이 아가씨는 붉은 루비를 아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숙였던 허리를 세우자 가면 너머로 눈이 마주치는 것이 느껴졌다. 약간의 침묵이 맴돌았다. 흰 고양이는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황제는 싱긋 웃었다. 잠시 당황한 듯 입매가 굳어있던 그녀는 이내 마주 웃어주고는 몸을 돌려 천천히 멀어졌다. 황제는 굳이 그녀를 잡지 않았다. 하늘색의 드레스자락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자박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황제는 그 자리에 서서 그녀가 천천히 연회장 밖으로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흰 고양이 가면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황제는 다시 버릇처럼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새벽 동이 터 올 때 즈음 처소로 소리죽여 들어온 황제는 답답한 가면을 벗어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불빛 하나 없는 침실을 밝혔다. 화병에 꽂혀있는 붉은 장미가 방금 놓인 것처럼 싱싱했다. 황제는 자신의 기억에 없는 잘 손질된 장미 한 송이를 바라보며 조금 웃었다. 장미는 마치 루비처럼 영롱한 붉은 색을 내고 있었다. 장미를 뽑아들고 잠시 그 향을 맡은 황제가, 조금 열린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내 기억에 없는 얼굴이라 주시하고 있었지.”
바람이 살랑 불어 황제의 금발을 스쳤다.
“만나서 영광이었어, 괴도.”
별안간 돌풍이 불어 창문이 활짝 젖혀졌다. 하늘하늘한 커튼이 나부꼈고 작게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는 미소 지으며 쏟아지는 달빛을 온 몸으로 받았다. 장미꽃잎이 거센 돌풍에 못 이겨 떨어졌지만 황제는 여전히 창가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돌풍이 그칠 때 까지 잠시 동안 아무것도 없는 밤하늘을 응시하던 젊은 황제는 소리 없이 웃으며 장미를 다시 화병에 꽂기 위해 몸을 돌렸다. 황제가 문단속을 위해 창가로 돌아왔을 때, 창틀에서 흰 고양이가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