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아의 일기
리즈하
연락을 받고 크리스탈 가든으로 돌아오자마자 받은 물건을 그는 탁자 위에 조심스레 내려놨다. 아리아의 일기, 얼마 전 에레브를 방문했을 때 여제가 건넨 빛바랜 종이뭉치가 지금 제 시선 끝에 멀쩡한 공책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묘한 긴장을 일으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알아볼 수 없는 글씨를 읽으려 애쓰며 그나마 깔끔한 몇몇 장에 적힌 내용을 보고 키득대던 게 불과 몇 달 전이었는걸. 훼손된 유물을 복원하는 솜씨가 기가 막힌 전문가를 찾았을 뿐이라며 자랑스레 안경을 올려 쓰던 마오가 이때처럼 멋져 보인 적이 없었다.
왠지 모르게 왕관처럼 돋아난 나무들로 둘러싸인 미로를 걷는 기분. 팬텀은 천천히 심호흡했다. 저번에 읽었던 장들이 신출귀몰한 괴도를 만나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담고 있다면 지금 복원된 건 반대로 팬텀을 만난 그 이후의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을 터였다. 나와 같은 시간에 같은 기억을 공유한 당신이라면, 느끼는 감정도 조금은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당신 또한 하얀 달빛에 이유 모를 그리움을 느꼈을까. 생경한 설렘에, 숨이 가쁘도록 가슴을 죄어오는 따스함에, 불완전한 만큼 간절한 행복에 흐르는 마음을 맡긴 적이 있었을까. 그러한 궁금증은 사내를 짙은 초록빛 속으로 밀어냈고, 그는 기꺼이 제 손에 쥐인 열쇠를 내려놓고 더욱더 깊은 곳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숙녀의 비밀을 들추는 건 신사로서 예의가 아닌데, 하면서도 두 자안에는 이미 작은 글자들이 가득 담겼다.
푸른 월광 아래, 춤추듯 어지러이 모여든 카드 무리 사이로 야지랑스럽게 웃음짓던 어린 괴도. 바람처럼 이곳저곳 흘러들며 그가 추구하는 자유로움을 동경했고, 보랏빛 형형한 눈동자를 바라볼 때 안정되는 마음이 신기하더라는. 그는 제게 유령이 아닌 꿈이었고, 갈수록 품 안에 들어올 듯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는 환상이었다는, 그런 이야기. 쉬지 않고 페이지를 훑어내리던 시선은 소녀다운 동글동글한 글씨로 적힌 한 문구에 이르러 멎었다. 기적을 믿어요, 팬텀?
그 다음, 싱그러운 향취가 나는 것만 같은 페이지에 보관된 시간은 부유섬의 숨겨진 공간에서 보낸 것이었다. 낡아빠진 문에 자물쇠까지 채워진, 심지어 여제 본인조차 에레브에 있는지도 몰랐던 곳. 일종의 모험이라 생각했는지 문을 따 주겠다는 팬텀의 제안도 거절해 가면서 기어이 열쇠를 찾아낸 아리아는 눈에 띄게 들뜬 표정으로 문을 열었는데, 보일락말락 희미한 금색 글씨로 화원이라 적힌 간판이 무색하게도 그 안은 잡초만 무성하더라는 상황이 어찌나 허탈했는지.
무척 오래 전의 장소였는지 만발한 백화는커녕 빨간 장미 한 송이 안 보이는 데에 실망하고 무심코 고개를 돌린 순간 시선 끝에서 샛노랗게 반짝이던 민들레,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비스무리한 그 민들레가 그토록 고와 보였던 것은 아마 그 전까지의 풍경 때문이었으리라. 그렇게 수수한 들꽃 한 아름을 다발로 엮어 건네주니 마냥 하이얀 얼굴이 붓그리듯 발갛게 달아오르고, 그 순간 가녀린 두 팔이 그러안은 세계에서 진동하는 풀내음. 일종의 자그마한 기적, 처음 발견한 민들레에 대한 심정 묘사가 제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무척 묘한 기분이 되어 페이지를 넘겼다.
아리아, 나의 아리아. 천재 음유시인이 지어 읊는 낭만적인 시 속의 귀공녀조차도 그대의 고결함에는 미치지 못할 테지. 에레브의 창공을 한 스푼 떠 고스란히 담아낸 눈동자는 사파이어의 푸른빛이요, 평화를 노래하는 입술은 그 향취 매혹적인 장미를 피워내며……. 오, 이런. 치명적인 말실수로 그녀를 화나게 했던 어느 겨울날, 살을 에는 찬바람만큼이나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짜냈던 멘트가 그대로 적힌 페이지를 보며 팬텀은 실소했다. 그날 끝내 팬텀답다며 볼에 보조개가 쏙 들어가게 미소짓던 아리아는 제 생각처럼 그렇게 순진하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정신이 아찔하도록 달콤하기는 하나 갈수록 진부하기 짝이 없는 세레나데 같은 느낌, 지금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두꺼운 낯짝이 다 뜨거울 지경이었다. 아마 허세의 정점을 찍었던 때여서 그랬을 거야 저 때가, 아니면 그만큼 간절했거나. 다급하게 자기합리화하며 다음 장으로 넘겼지만 이미 휘어진 손끝은 한참 동안이나 펴지지 않았더랬다.
달밤의 밀회, 여제로서의 굳건한 책임감과 자유를 향한 갈망, 입술과 입술 새를 맴돌며 이어지던, 팬텀과 아리아와 그 외의 모든 것들을 위한 영원의 맹세… 이들이 모두 얽혀 끝에 남은 건 결국 몇 방울의 슬픔이었다. 대부분은 아름다운 추억이 틀림없는데도 우아한 글씨 위에 입힌 감정에 동화된 가슴은 미어지다 못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끝내 페르소나를 눌러쓰고 마지막 장을 펼치며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회담 바로 전날 날짜가 적힌 페이지에 말라붙은 꽃잎은 지독하게도 붉어, 피어있을 적의 완전한 모습보다는 그 날카로운 가시를 연상케 했다. 그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한 문장을 작게 소리내어 읽었다. 팬텀, 기적을 믿나요?
내 기적은 당신이에요, 바깥의 바람을 전해준 당신.
일기장을 덮었다.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답은 찾은 지 오래인데도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저 말을 쓸 당시 그녀는 행복했을까, 아니면. 갑작스레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는 건 장미 향이 너무 짙기 때문이라고, 누구도 듣지 못할 변명을 늘어놓으며 팬텀은 울었다. 울면서 말했다. 너 또한 나의 기적이었노라고.